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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우이 월데 셀라시에(Herouy Wolde Selassie) 그리고 아도와전투 (Adwa battle)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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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우이 월데 셀라시에(Herouy Wolde Selassie) 그리고 아도와전투 (Adwa battle)

나연아범 2024. 11. 12.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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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우이 월데 셀라시에(Herouy Wolde Selassie)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에티오피아의 중요한 정치인, 외교관, 지식인이자 작가이다. 그는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였던 멘리크 2세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치세 동안 여러 중책을 맡아, 서구 열강과의 외교를 담당하며 에티오피아의 자주권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헤로우이 월데 셀라시에는 1878년 에티오피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당시 에티오피아가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배경 속에서 성장했다.

셀라시에의 가문은 에티오피아의 사회와 정치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이는 그가 나중에 외교관이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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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우이는 멘리크 2세의 치세 동안 에티오피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주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열강과의 외교 업무를 맡았으며, 에티오피아의 독립성과 자주권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그는 1896년의 아도와 전투 이후 강화된 에티오피아-이탈리아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도와 전투에서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를 격퇴함으로써 독립을 지켰지만, 이후에도 서구 열강은 에티오피아에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이에 맞서 헤로우이는 외교적 협상과 타협을 통해 에티오피아의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했다.

헤로우이 월데 셀라시에는 외교관으로서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의 사회적, 문화적 발전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다양한 글을 쓰며 에티오피아의 역사와 전통,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서구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에티오피아가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다.

또한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에티오피아 젊은 세대가 서구의 과학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로우이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에티오피아가 식민 지배를 피할 수 있도록 서구와의 외교에서 에티오피아의 입지를 강화한 것이다. 그는 외교적 지혜를 발휘하여 에티오피아와 서구 열강 사이의 균형을 유지했고, 이를 통해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거의 유일하게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https://youtu.be/3Uonn7EL9lY?si=lNmf4mpols85k3gO

헤로우이 월데 셀라시에는 에티오피아의 독립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인물로, 그의 업적은 에티오피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서구 열강과 협상하고, 지식인으로서 에티오피아 사회에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에티오피아가 국제 무대에서 독립적인 국가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아도와 전투(Battle of Adwa)는 1896년 3월 1일 에티오피아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 사이에서 벌어진 중요한 전투로,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아프리카 국가로서 독립을 지켜낸 역사적 사건이다.

이 전투는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 국가가 유럽 열강을 상대로 거둔 큰 승리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멘리크 2세 황제의 지도력 아래 에티오피아가 단결하여 이탈리아군을 물리친 상징적인 전투로 남아 있다.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하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하며 '아프리카 분할(Scramble for Africa)'이라고 불리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이탈리아는 이 과정에서 에티오피아를 자국의 보호국으로 삼으려 했다. 특히 1889년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는 '우칠리 조약(Treaty of Wuchale)'을 체결했는데, 에티오피아어와 이탈리아어 버전 간의 차이로 인해 조약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게 되었다.

이탈리아어 버전은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의 보호국임을 암시했지만, 멘리크 2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조약을 폐기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침공을 단행했다.


멘리크 2세는 이탈리아의 침공에 대비해 전국적인 단결을 이끌어내며 대규모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각 지역의 군대를 소집해 약 1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확보했다. 에티오피아 군은 전투에서 활을 비롯한 전통 무기와 일부 현대식 무기를 함께 사용했으며, 지역사회의 단결을 통해 병참 지원도 원활히 이루어졌다.

1896년 3월 1일, 아도와(Adwa) 지역에서 양측 군대가 충돌했다. 이탈리아 군대는 병력과 물자 면에서 에티오피아보다 열세였고, 험준한 지형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해 혼란에 빠졌다. 멘리크 2세는 이탈리아 군대의 혼란을 기회로 삼아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으며,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군은 에티오피아 군에게 대패하고 후퇴했다.



아도와 전투에서의 승리로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침략을 저지하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는 패배 이후 1896년 10월 '아디스아바바 조약(Treaty of Addis Ababa)'을 체결해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독립을 공식 인정했다.
이로써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유럽 열강의 식민 지배를 피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아도와 전투는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 국가가 유럽 열강을 상대로 승리한 중요한 사건으로, 이후 아프리카와 전 세계 식민지 독립운동에 큰 영감을 주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독립을 유지한 상징적인 국가로 자리 잡게 되었고, 멘리크 2세는 아프리카의 독립과 자주성을 지켜낸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았다. 이 전투는 또한 서구 열강에게 아프리카의 저항 능력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에티오피아의 자주적인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아도와 전투는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지켜내고 유럽의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멘리크 2세의 지도 아래 에티오피아 국민들이 단결해 승리를 거둔 이 전투는 현대 에티오피아의 국가적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아프리카와 전 세계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에 큰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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