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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연아범의 산업보건이야기
<리뷰> <안창남, 서른 해의 불꽃같은 삶> 서해문집 - 길윤형 본문
이 책의 저자는 길윤형은 <안창남, 서른 해의 불꽃같은 삶>의 저자이면서 조선인 가미카제 희생자에 대해서도 글을 쓰신 분이다.
이 책의 서문에는 태평양 전쟁 시 희생당한 조선인 조종사들에게 있어 안창남은 비행기 조종사들 즉 그 당시 조선 청소년들에게 있어 비행 영웅과도 같은 존재였다.
태평양 전쟁 당시 1000여 명이 가미카제에 희생되었고 17세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 안창남은 국운이 기운 조선에서 안창남과 같이 중국 벌판에서 항공기를 조종하는 것이 최대의 꿈이었을 것이다.
일본 군부는 조선인 조종사들에게도 가미카제 임무를 부과했으며. 이들은 일반적인 조종사보다 훨씬 더 짧은 훈련을 받은 채로 자살 임무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가미카제 임무의 특성상 조종 기술보다는 기본적인 이착륙과 폭탄 투하 기술만 익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인이 탔다는 기록은 없지만 비행폭탄 요코스카 MXY7 오카(Oka, ?花)의 경우 자살 특공기(인간 유도 미사일)로 설계되었으며, 이륙할 때는 바퀴가 달려있었지만, 공중으로 발사된 후 바퀴는 분리되었다고 한다. (다시는 못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럼 안창남은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안창남(安昌男, 1900?1930)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선구적인 비행기 조종사로, 대한 제국과 한국 근대 항공 역사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민간인 조종사로서, 특히 1922년 12월 10일에 서울 여의도에서 한국인 최초로 공개 비행을 성공시켜 큰 주목을 받았다.
그 당시 안창남은 2가지 종류의 비행기를 조종했다고 전해지는데 하나는 일본제 비행기 "我孫子 2?"(아사히 신문사 소유) 이었고 또 다른 것은 ミカド式4型이라는 단엽 복엽기였다고 한다.
안창남은 일본 도쿄에 위치한 **일본 비행학교(日本飛行?校)**에서 비행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1920년에 이 학교에 입학하여 비행기 조종사 교육을 받았으며, 1921년에 졸업하면서 조선인 중 일본 최초의 민간 비행사 면허를 취득했다고 한다.당시 일본에서도 주목받는 조종사였다고 한다.
1920년대 일본 비행학교에서의 비행 교육 비용은 1년 동안 약 2,000~3,000 엔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의 금액으로 비교해 보면 적어도 수천만 엔에 해당하는 금액 정도였을 것이다, 이는 상당한 액수였으며, 일반적인 소득을 고려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안창남은 조선 출신으로서 이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조선 일본 내 재력가 그리고 그 당시 항공을 관리했던 일본 체신청에도 많은 간섭을 받았을 것이다. 일본 내에서도 비행기 광고 전단지를 뿌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1923년 일본을 떠나 상하이로 이주한 후,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된 여러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그의 비행 능력을 이용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등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의 비행은 한국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당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가 보여준 하늘을 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한국 항공사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화려한 비행 기록에도 결국 일찍 찾아온 그의 말년은 한민족이 아닌 중국 군벌들의 아우라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1930년대에 들어서 안창남은 일국 상하이에 머물며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을 주고받았고, 주로 항공 관련 기술을 제공하며 독립운동에 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에서 활동했다. 중국에서 상하이에서의 활동은 주로 항공 기술과 군사 훈련 지을 통한 독립운동 지원이었다.
안창남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국민당과도 연계하여 활동했으며, 당시 중국 내에서도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이 심화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위험에 처해 있었고, 안창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안창남은 중국 군벌의 엔시샨 휘하에서 공군 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 1930년대 중국의 군벌 중 하나였던 엔 시산(閻錫山, Yan Xishan)은 산시성(山西省)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군사 지도자였다. 그는 산시 지역의 통치자이자 독자적인 군대를 운영하며, 일정한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공군력은 당시 중국 전역의 군벌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제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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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엔시샨은 군사적으로 산시 성에서 독립적인 입지를 다지기 위해 육해공 전력을 강화하려 했다. 특히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그는 자신만의 군사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으며, 공군을 창설하고 현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공군력을 갖춘 몇 안 되는 군벌 중 하나였으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엔시샨은 외국에서 항공기를 수입해 자신만의 공군 부대를 조직했다.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항공기를 구매했고, 특히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항공기와 항공 관련 기술을 들여왔다. 그가 도입한 항공기는 주로 정찰기와 폭격기였으며, 이는 산시 지역의 군사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이었다.
엔시샨은 비행사 훈련에 투자하여 공군력을 강화했다. 산시성 내에서 비행 훈련소를 운영하며, 산시 출신의 젊은이들을 훈련시켜 공군의 기반을 다졌다. 그 당시 안창남도 비행교관으로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창남의 활약에도 엔시샨의 공군력은 군벌 수준에서의 제한적인 전력이었으며, 중국 전체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중국 내 다른 강력한 군벌이나 중앙정부에 비해 규모와 기술적 수준에서 열세였다. 당시 중국의 군벌들 대부분은 현대적 무기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며, 공군력도 다른 주요 강국에 비해 매우 미약한 수준이었다.
엔시샨의 공군은 주로 정찰과 지상군 지원에 활용되었습니다. 그는 산시 성을 방어하고 지역 내 다른 군벌들과의 전투에서 공군을 전략적으로 활용 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이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그리고 일본의 침략 등으로 인해 더 큰 혼란에 빠지면서, 군벌들의 독자적인 군사력은 점차 중앙 세력에 흡수되거나 약화되었다.
1930년에 비행 도중 불의의 사고 사망했다. 안창남은 다른 두 명의 비행사와 엔시샨의 전용 특별기 융커스 F-13 (Junkers F.13)을 운행하다 항공사고를 당해 그의 인생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F-13 (Junkers F.13는 독일 융커스(Junkers) 회사에서 1919년에 설계한 세계 최초의 전 금속 여객기이었다..
융커스 F-13은 전 금속 구조(monocoque metal construction)를 사용한 최초의 상용 비행기였고 이전 F-13은 두랄루민(Duralumin)이라는 그 당시 최첨단 금속을 사용하여 내구성과 안전성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 비행기는 조종사 2명과 승객 4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였다. 승객들은 폐쇄된 객실에 탑승했지만, 조종사는 개방된 조종석에서 비행해야 했다. F-13은 여러 가지 엔진 옵션을 사용했는데, BMW IIIa 6기통 수랭식 엔진을 사용하는 초기 모델은 약 185마력의 출력을 제공했다. 이후 다양한 엔진이 장착되어 성능이 개선된 그 당시 최첨단 항공기였다.
안창남의 죽음 역시 돌이켜 보면 안창남의 뛰어난 비행기술도 있었지만 그 당시 독일제 비행기에 대한 중국 기술인력의 실력 부족과 기타적인 요소로 엔시샨의 특별기를 그 당시 몰아야 하는 역사의 의문점이 아닌지 생각이 든다.
융커스 F-13은 혁신적인 항공기였지만, 그 구조와 설계 때문에 정비와 운항에는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했다고 한다. 전 금속 구조의 유지와 엔진 관리는 정밀한 정비 기술을 요구했고, 미숙련된 조종사가 비행할 경우 기체 조종이 어려워 사고 위험이 존재했다. 특히 저 이거 단 엽기의 특성, 개방형 조종석에서의 환경 대응, 그리고 조종 시스템의 감도 때문에 경험이 부족한 조종사에게는 어려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창남은 한국 항공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그의 도전과 용기는 지금도 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안창남에 대해서 자세하고 심도 있는 이야기는 서해문집 <안창남, 서른 해의 불꽃같은 삶>를 통해 접했으면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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