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연아범의 산업보건이야기

중국 국민당군과 팔로군은 일본항공기에 당하고만 있었나?(3) 본문

서평

중국 국민당군과 팔로군은 일본항공기에 당하고만 있었나?(3)

나연아범 2025. 2. 13. 10:32
반응형

중일전쟁(1937~1945) 말기 일본군의 제공권 장악은 광활한 대지에서 노출된 체로 싸워야 했던 국민당군(국민혁명군)과 공산군(팔로군, 신사군)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나마 국민당군은 미국, 소련, 독일 등 여러 국가에서 지원받은 무기를 운용했으며, 대공무기도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일본 항공전력에 응전하였다.

 

M2 브라우닝 12.7mm 중기관총 같은 미군이 공여해 준 기관총류와 M1 37mm 대공포 (미국 지원) ,소련제 37mm M1939 대공포, 보포스 40mm L/60 대공포 (미국과 영국이 지원) 등으로 무장하여 그나마 공산군 홍군과 비교하여 준수한 전력으로 무장을 하였다. 반면에 공산군 홍군은 일본군과의 전투보다는 게릴라전에 집중했기 때문에 대공무기가 매우 부족했다. 대체로 노획한 일본군 무기나 국민당군과의 내전에서 확보한 무기를 사용했다. 노획한 일본군 대공무기인유탄 기관총(97식 7.7mm, 99식 7.7mm)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25mm 96식 대공포로 사용하였다.또 국민당군으로부터 확보한 무기인 막심 M1910 7.62mm 기관총 또는M2 브라우닝 12.7mm 중기관총을 사용하였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일부 기관총을 개조하여 대공 사격용으로 운용했다고 한다.공산군 홍군 은 대공무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효과적인 방공전력을 갖추지 못했고, 일본군 항공기의 공격을 피하는데 급급했다.

https://youtu.be/EA0WCW4TQc8?si=P7UeZp0TjXjG83YV

위의 드라마처럼 소총으로 중국군이 일본군 전투기를 떨어뜨리는 무쌍도 있었다고는 한다. 드라마이겠지만 수류탄을 던져서 떨어트리는 장면도 있다. ​

1937년 중일 전쟁 시 일본 육군 항공대에서도 급강하 폭격기 계념의 기체가 등장한다. 그 당시 전투기와 대전보다 일본 육군 항공대가 지상에 있는 국민당군 또는 팔로군 제압 시 필요한 지상군 습격기 계념의 기체의 개발 필요성이 나온다.

그래서 나온 기체가 Ki-51 (三菱 九九式襲撃機, Mitsubishi Ki-51)이다. 일본 제국 육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사용한 단좌(1인승) 지상공격기이다. 미쓰비시 중공업("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 호리코시지로가 1927년 입사한 곳) 이 설계하고 제작했으며, 연합군 코드명은 Sonia였다.Ki-51은 경폭격기(공격기)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여성 이름이 부여되었다."Sonia"라는 이름 자체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연합군의 명명 규칙에 따라 무작위로 선택된 서양식 여성 이름이었다.

연합군 사이에서 일본군 폭격기들에 여성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Ki-51 99식 지상공격기는 근접항공지원(CAS) 및 정찰이 주임무였으며 미쓰비시 중공업이 개발하여 1939년 초도 비행에 40년에 배치되었다.구조는 날개가 기체 하부에 위치한 저익단엽기였다.일본항공기 기술진들이 선호했던 저익단엽기는 동체와 날개를 직접 연결할 수 있어 구조적으로 더 강하고, 높은 속도를 견디는 데 유리했습니다고 한다.당시 일본군은 경량 구조와 기동성을 중시했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내구성과 방어력을 고려해야 했고. 저익 설계는 이에 부합하는 선택이었다.

또한 저익 설계는 공기 저항을 줄이고 속도를 높이는 데 유리했고 연료 탱크를 날개에 배치하기 쉬워 장거리 비행에 적합했다.그리고 고익기보다 기체 하부에 더 많은 폭탄이나 무장을 장착하기 편리했다.승무원: 2명 (조종사 + 후방 사수)이 탑승했다. 무장은 2 × 7.7mm 기관총 (고정 전방 사격) 1 × 7.92mm 후방 기관총 (방어용) 최대 200kg 폭탄 탑재 가능했다.

Ki-51은 그 당시 중국군 전투기와의 공중전에서 불리했다. 속도가 느리고 방어 무장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적 전투기와 정면으로 싸우는 대신, 호위 전투기에 의존했다. 그러나 저속에서 기동성이 좋고, 내구성이 강한 점 덕분에 일부 전투기들과 교전 중 생존하는 경우도 있었다. Ki-51을 괴롭힌 것은 중국 공군과 소련/미국이 중국 공군에 지원한 I-15, I-16, P-40 기종들이었다.

그중 국민당군이 진골처럼 우려먹은 것이소련이 공여한 I-16이다.소련은 중일전쟁 당시 300기의 폴리카르포프 I-16 전투기를 중국 국민당군 공군(중국 공군)에 지원했다. 첫 번째 지원은 1937년 10월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추가로 제공되었다.

이는 소련의 대 일본 전략의 일환으로, 중국을 지원하여 일본의 대륙 진출을 저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러지 않아도 일본은 소련을 칠 능력이 안되었다)

 

국민당군 공군은 I-16을 주력 전투기 중 하나로 운용했으며, 특히 일본군의 고속 단엽기(Ki-27, A5M 등)와의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I-16은 당시 중국이 보유한 복엽기(I-15)보다 속도가 빠르고 무장이 강력했으며, 일본군의 Ki-27(나카지마 "Nate") 및 A5M(미쓰비시 "Claude")과 맞설 수 있었다.

특히 I-16은 중국 공군 최초의 완전 금속제 단엽기로, 일본군의 복엽기보다 속도와 방어력이 뛰어났다.1937~1939년 동안 난징, 한커우, 충칭 방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소련은 중국 공군에는 숙련된 조종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소련에서 의용군(지원 조종사) 을 파견하여 I-16을 직접 운용하기도 했다. 소련 조종사들은 1937~1938년 동안 일본군과의 여러 공중전에서 실력을 발휘했으며, 일부는 중국 공군 조종사를 훈련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https://youtu.be/7GAlZor0WZQ?si=bwRVDQojNiUQaIYR

일본군 폭격기가 중국 본토 도시(예: 난징, 한커우, 충칭 등)를 공습할 때, I-16은 요격기 역할을 했으며 여성스러운 일본군의 경폭격기 중폭격기들에게 잠시나마 위협이 되었다.

반응형
Comments